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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레스토랑

dowhq 2024. 1. 22. 06:45


지젝은 세계적인 사기꾼이다. 지젝은 촌구석 차원의 무뢰배가 아닌 전지구적 차원의 지적 건달이다. 이 말을 해놓고 보니 내가 마치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 안데르센 동화의 순진한 소년처럼 느껴진다. 지젝의 표현을 빌어 나도 이 지면에선 똑똑 바보 의 천치 역할을 연기 좀 해야겠다. 헛똑똑이 라는 말이 좀 더 우리말스럽지만 말이다. 지젝의 사기꾼적 기질은 헤겔을 라캉을 전유해서 해석하겠다고 나선다는 점에 있다. 변증법자 헤겔을 굳이 반변증법자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라캉을 통해 볼 필요가 있을까? 잘 알다시피 심리학의 거두 프로이트와 라캉 모두 무척 반철학적이었다. 라캉이 살아있다면 분명 자신의 담론으로 헤겔을 풀어보겠다는 지젝의 장난질 에 반감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래도 지젝의 의도는 일단 접수했다. 지젝이 라캉으로 헤겔을 읽겠다는 것은 독일관념론에 대한 전복과 비판적 오독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을. 독일관념론의 전통은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이라는 4인방이 확립했다. 지젝은 교묘하게 칸트는 뉴턴 과학에, 피히테는 정치에, 셸링은 예술에, 헤겔은 사랑에 귀속시킨다. 그런데 지젝의 이런 범주화는 아무 의미도 없다. 솔직히 칸트의 저작에서 과학뿐만 아니라 예술과 사랑과 정치 모두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겔 철학이 사랑 의 철학이라는 지젝의 궤변이 우습다. 지젝은 이 책 서문에서 독자들의 비판력 향상을 위한 유용한 개념어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도 세 가지나 말이다. 천치(IQ 0-25), 또라이(IQ 26-50), 얼간이(IQ 51-70)가 그러하다. 단지 지능지수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라캉이 말한 큰 타자 와의 맥락을 고려한 분류이기도 하다. 지젝의 욕 에는 철학과 심리학이 담겨 있다. "천치는 그야말로 혼자로, 큰 타자 바깥에 있으며, 얼간이는 큰 타자 내부에 (멍청하니 언어 속에 거주하면서) 있으며, 또라이는 이 둘 사이에 있다. ㅡ큰 타자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은 채, 그것을 불신하면서.ㅡ"(25쪽) 지젝은 천치의 전형으로 천재수학자 튜링을, 얼간이의 전형으로 위대한 탐정의 멍청한 파트너들, 가령 홈즈의 왓슨, 푸아로의 헤이스팅스 등을 꼽았다. 그리고 또라이의 전형으로 카프카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내세운다. 그런데 어찌할까나? 지젝을 추종하는 국내외 얼간이들도 넘쳐나는데 말이다. 이런 얼간이들은 비록 먹물은 좀 먹었지만 헤겔도 라캉도 하이데거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풋내기들이다. 그런데 지젝의 말대로 라캉과 라캉의 이론이 정녕 헤겔의 반복에 불과할까? 보다 정직하게 얘기한다면 두 사람 모두 그저 플라톤의 반복, 아니 신플라톤주의자의 뒤를 잇는 지루한 철학적 재생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스탈린주의자로 자처하는 지젝은 헤겔을 읽는 것이 우리의 넘어설 수 없는 인식지평이라고 주장하는데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전체주의도 우리의 넘어설 수 없는 악의 지평을 펼쳐보인 장본인들이다. 내가 존경하는 노엄 촘스키 선생이 지젝이 얘기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못하겠다고 평한 것은 무척 정당한 비판이다. 칸트와 헤겔의 철학을 적절하게 이해한다면 지젝의 반칸트적 노선에 불만을 품을 수 밖에없다. 내가 보기엔 지젝은 진보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괴팍한 영화평론가, 혹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체계가 없는 삼류 정치학자에 불과하다. 내가 보기엔 지젝은 폐기처분 되어야 마땅한 전체주의 신화를 다시 재활용하려고 노력하는 얼간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헤겔 철학과 라캉 심리학에서 폭력적인 정치적인 신화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런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젝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유물론과 인지주의에서 이것저것 끌어모았지만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를 이루지 못했다. 지젝이 묘사하는 헤겔은 진짜 헤겔의 초상이라고 볼 수 없다.
라캉을 통해 묻고 헤겔이 답하다

Less than Nothing 의 첫 번째 편이다. ‘고급 담론’으로 위장한 지적·정치적 패배주의를 격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사유의 긴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말꼬투리를 잡거나 ‘정치적으로 당연한’, 또는 ‘좌파적인’ 비판으로는 쉽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따라서 존재론과 형이상학 전체를 아우르는 근본적 개념의 조탁없이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기는 지난한데, 드디어 지젝은 이 책을 통해 ‘Less than Nothing’을 그러한 개념으로 도출하고 있다.

헤겔은 모스트모더니즘에 의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비판하는 모든 것의 원횽으로 비난받았지만 지젝의 이 책에서는 현대 철학의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일종의 구세주로 등장한다. 물론 그것은 라캉을 경유한 헤겔이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설정 하나만으로도 지젝의 이 책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특히 변증법, 역사 철학, 유물론 등 그동안 우리 사유에서는 거의 방치되거나 외면되어온 주제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여 역으로 헤겔이나 유물론을 비판해온 논자와 논지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지젝의 논지는 흥미를 더한다. 예를 들어 ‘이성과 광기’에 대한 푸코와 데리다 사이의 논쟁에 대해 일부 진보적 학자들은 역사주의자 푸코 대 텍스트주의자 데리다라는 식으로 논의를 굴절시켜 푸코를 지지하지만 지젝은 데리다의 ‘차연의 철학’을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독해한다.


1부 식전에 한 잔

서문: 그래도 그것은 돈다
옮긴이 서문을 대신해서

01 ‘상블랑들을 뒤흔들기’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보여져야 한다 / 이데아의 출현 / 픽션들로부터 상블랑들로 /
변증술의 연습이요? 아뇨, 됐습니다! / 일자에서 덴den으로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플라톤이 아니라 고르기아스가 원조-스탈린주의자이다!

02 아무 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는 말로 읽어라
기독교적 비극?/ 큰 타자/ 신의 죽음 / 무신론적 내기/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 / 라캉 대 불교

03 피히테의 선택
피히테의 나로부터 헤겔의 주체로 / 피히테적 내기 / 동인과 행위-행동 / 분할과 한정 /
유한한 절대자 / 정립된 전제/ 목에 걸린 피히테적 가시 / 최초의 근대 신학

2부 물 자체 : 헤겔

04 오늘날에도 여전히
헤겔주의자가 되는 것은 가능할까?
헤겔 대 니체 / 투쟁과 화해 / 해야 할 이야기 / 운명을 바꾸기 / 미네르바의 부엉이/
잠재태 대 잠재성 / 원환들의 헤겔적 원환

간주곡 1 헤겔의 독자로서의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독자로서의 헤겔

05 병렬: 변증법적 과정의 형상들
오성을 찬양함 / 현상체, 예지체, 한계 / 불화 / 부정의 부정 / 형식과 내용 /
내실 없는 부정

간주곡 2 광기의 역사 속의 코기토

06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구체적 보편성 / 헤겔, 스피노자 …… 그리고 히치콕 / 헤겔적 주체 / 절대적 앎
/ 이념의 변비? / 나, 즉 동물

간주곡 3 왕, 천민, 전쟁 …… 그리고 섹스

07 헤겔의 한계들
하나의 목록 / 자기지양된 우연성으로서의 필연성 /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의 이형태들 /
형식적 측면 / 지양과 반복 / 반복에서 충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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