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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여름 방학보다 겨울 방학이 늘 기다려지고 좋았다. 모든 이유를 제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였다. 도서관이나 지인의 책장에서 빌린 책들을 쌓아 놓고 읽을 때의 그 뿌듯함과 느긋함.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라도 되면 세상에 혼자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책이 더 잘 읽히곤 했다. 그런 기억이 희미하게만 남아 있을 뿐, 어떤 책을 읽고 즐거워하고 어떤 문장을 보며 감동 받았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그 당시에 집중하면서 즐겁게 읽었던 추억이 떠올라 무언가 아련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첫 단편「세상 끝의 신발」때문인지도 모른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쌓인 눈, 신발, 그리고 토방위에 놓인 순옥 언니의 신발. 이 소재만으로도 내가 자란 시골의 겨울을 추억해 내기에 충분했다. 흰 눈이 쌓인 날이면 제일 먼저 내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괜히 마당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지금의 시골집으로 변모하기 전 나무 마루에 토방이 있었던 집을 기억하기에 더 옛 추억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내가 타인에게 이웃집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 같은 착각이 이는 것도 아마 이런 역할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늘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해외문학이라고 말하면서도 곰곰 생각해보면 국내문학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초등학교 때는 시간이 남아돌아 닥치는 대로 학급도서를 읽었고 중학교 때는 필독서라는 명목 하에 이해하기 힘든 한국명단편들을 읽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닥치는 대로 읽되 서서히 해외 명작으로 손을 넓혔던 것 같다. 그러다 해외문학에 빠져 국내문학을 등한시 하게 되었고(국내 현대문학을 읽으면 도피하고 싶은 현실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 더 피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가끔 이렇게 괜찮은 소설을 읽으면 국내 문학의 소중함과 매력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참 재미있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이 들어 반가웠다. 국내문학에 목말라 하면서도 그만큼 등한시 했던 티가 역력히 드러나는 경험이 아닐 수 없는데 그래서인지 더 꼼꼼하고 신중하게 정독했던 것 같다.
장편소설도 그렇지만 단편집은 한 번 흐름이 끊기면 그대로 묵혀 두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집도 아껴가면서 읽다 마지막 두 편을 남겨 두고 오랫동안 책장에 묵혀 두었다. 그러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나고 그 감정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 꺼내들었는데 역시나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책장을 덮으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우리 주변에 있는 이야기 같지만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라고 생각되는 정갈한 글들. 저자의 필력에서 느껴지는 힘이 나에게 온전히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 상태라면 저자의 다른 글들을 얼른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도 했는데 역으로 때를 기다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각기 다른 분위기를 내는 단편들이 한 권의 책에 쌓이기까지의 시간이 8년 만이라고 하니(8년 만의 출간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한 권의 책이라도 쉬이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내가 자라온 배경, 문화, 시대상을 무시하지 못한 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이유도 크지만 같은 정서를 지닌 눈에 드러나지 않는 감정도 결코 지나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옛날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많은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자잘한 소품과 소재들에서 내가 자라온 환경의 비슷한 면을 들춰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팍팍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옛 추억이 더 진하게 올라오는 이 시점에, 그냥 아무런 생각도 번민도 없이 눈이 내리는 겨울, 고향집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재미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잠시나마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간 내가 살아온 시절들이 이상하리만큼 소중하게 느껴지고 있다.
전 세계 31개국 독자들과 함께 읽는 작가, 신경숙
8년 만에 출간하는 7편의 마스터피스
외롭고 소외된 존재들에게 들려주는 신경숙 문학의 나직한 속삭임
팔 년 만에 출간되는 여섯번째 소설집 모르는 여인들 은 세계로부터 단절된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풍경들을 소통시키기 위한 일곱 편의 순례기로, 익명의 인간관계 사이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작가는 특유의 예민한 시선과 마음을 집중시키는 문체로, 소외된 존재들이 마지막으로 조우하는 삶의 신비와 절망의 극점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빛들을 포착해내어 이 시대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바닥 모를 생의 불가해성을 탐색한다.
이 일곱 편의 단편은 신경숙 문학의 가장 깊은 곳에서 떠올리는 한 바가지 샘물과도 같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으나 눈에 띄지 않는 것들, 작고 희미하게나마 끊임없이 제 존재를 드러내지만 끝내는 수신되지 못하던 그 목소리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그들이 보내는 희미한 발신음을 포착해내고 불러내어 보듬어주는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손길, 눈길, 그리고 숨결……
세상 모든 숨겨진 존재들, 사물들, 풍경들이 뿜어내는 희미한 숨결과 그를 어루만지는 작가의 더운 숨,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어쩌면 이름없는 존재인 동시에 그 순간을 함께 호흡하게 되는 독자들의 깊은 숨이 한데 엉키어드는 일. 이것은 분명 신경숙의 문학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첫 소설을 선보인 지 어느새 이십육 년, 그동안 적지 않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들. 그의 말을 빌려 그대로 독자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인간이 지닌 숱한 결핍과 오류와 온갖 종류의 고통과 누추함과 간혹 탄식을 내뱉게 하는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말 걸기이기도 한 그의 작품들이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놓여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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