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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북회귀선 툰드라 캄차카 반도 일각고래 북해 인도양 날짜변경선. 난 이런 말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여기에는 내가 모르는 말이 더 있을지도 모를 텐데 다 적지 못했다. 난 어딘가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국경을 넘을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겠다. 국경을 넘는다고 크게 바뀌는 건 없겠지만. 선 하나로 나라가 바뀌는 건 신기할 것 같다. 그 선은 보이지 않겠구나. 어딘가에서는 그것을 쉽게 넘을 수 있겠지만, 어딘가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시에 저런 말을 쓴 건 허연이 그런 곳에 갔다 와서겠지. 어딘가에 다녀온 일과 자기 삶을 이어서 쓰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시인은 그런 걸 잘할지도 모르겠다. 시인만 그런 건 아니구나. 소설가도 다른 나라에 다녀오거나 어딘가에 다녀오면 그 경험을 소설로 쓴다. 경험한 대로는 아니지만. 바로 쓰는 사람도 있고 시간이 흐른 뒤에 다른 것과 함께 떠올라서 쓰는 사람도 있겠지. 별일 없는 일상도 시나 소설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난 그것을 잘 보지 못하고 그냥 흘려 보내는구나.
어딘가에 꼭 갔다 와야 좋은 건 아닐 거다. 그래도 많은 사람은 생각하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낫다고 하겠다. 본다 해도 그것을 말로 나타내기는 어려울 거다. 어딘가에 가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했다. 난 좋아하는 것도 많지 않고 하고 싶은 것도 얼마 없고 친구도 별로 없고……, 별로 없는 것만 말하다니. 뭐든 많다고 좋은 건 아니다. 내가 가진 게 얼마 없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친구가 많으면 모두한테 마음 쓰기 힘들지 않을까. 하고 싶은 게 많아도 다할 시간이 없어, 할 거다. 내가 게을러서 그렇구나. 부지런한 사람은 사람도 부지런히 만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시간을 쪼개서 즐겁게 하겠다. 그렇게 해도 괜찮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쉽게 지치는 사람도 있다. 몸보다 마음이. 어느 하나만 좋은 건 아니다. 이건 다들 아는 거구나. 자신한테 맞는 걸 알고 그렇게 살면 되겠지. 자신과 다른 사람도 있다는 걸 잊지 않으면 더 좋겠다. 내가 잊어버려서 이런 말을 했나보다.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가 뭍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고. 그는 한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다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다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자세>, 23쪽
처음 이 시를 보았을 때는 ‘기다림’이라는 말이 먼저 보였다. 지금은 북극곰과 늙은 바다코끼리가 보인다. <동물의 왕국>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다. 갑자기 그런 거 찍으려면 시간 많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극곰이 늙은 바다코끼리가 죽기를 기다리는 영상 있을까. 사흘 밤낮을 기다려도 죽지 않는 것도 있다니. 그 뒤에 북극곰은 무엇을 먹었을까. 새끼도 있는데. 지는 것도 받아들이기, 이건 배워야 하는 자세다. 늘 지기만 하는 사람은 마음 안 좋겠다. 아니 삶은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면 괜찮겠지.
살고 싶을 때 바다에 갔고, 죽고 싶을 때도 바다에 갔다. 사라질세라 바다를 가방에 담아 왔지만 돌아와 가방을 열면 언제나 바다는 없었다(<조개 무덤>에서, 66쪽)
바다를 어디에 담아오면 사라지지 않을까. 움직이지 않고 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사진으로 담으면 사라지지 않겠다. 실제 보는 바다와는 다르겠지만. 동영상으로 담으면 파도소리는 들을 수 있겠다. 살고 싶을 때와 죽고 싶을 때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지. 아니 둘 다를 좋아하겠다. 바다는 바다대로 좋고 산은 산대로 좋다.
시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이건 늘 그렇구나. 평소에 보기 어려운 일 같기도 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허연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잘 모르는 것뿐이다. 알듯말듯한 그런 느낌이다. 누군가를 그리는 마음도 있는 것 같고 남보다 빨리 기대를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시에는 아픈 마음을 더 쓰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를 만난 기쁨을 쓰기도 하지만, 누군가와 헤어지거나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난 일을 쓰기도 한다. 자신의 아픔을 시로 쓰면 그게 덜할까. 조금은 낫기도 하겠지. 시를 생각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다. “밤이 깊어 간다. 여린 짐승들의 머리 위로 꿈들이 떠다니고, 그 꿈들은 언젠가 달렸을 그 국도를 찾아 헤맨다. 왜 길들을 잃었을까. 여린 짐승들은 원래 길을 잃게끔 되어 있었던 것일까. 여린 짐승들을 위한 표지판은 따로 없었던 것일까. 여린 짐승 몇이 잠들어 있는 밤이다. (<안개 도로>에서, 24~25쪽)” 여린 짐승은 힘없는 짐승이기도 하겠지만, 사람 같은 느낌도 든다. 허연은 사람을 여린 짐승이라 생각하는 건 아닐지. 아픔 슬픔 죽음 같은 것은 자신한테 닥치치 않으면 잘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시로 적겠다. 어떤 일을 썼는지 내가 다 알아보는 건 아니고 감정만 느낄 뿐이다. 그거라도 느끼면 다행일지도. 한사람이 겪은 일이라고 해서 그 사람만의 일은 아니다. 똑같지 않다 해도 사람은 비슷한 일을 겪는다. 시를 보고 여러 감정에 공감하는 것도 괜찮겠다.
희선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떠올리고야 마는
당신이라는 운명, 영원히 불화할 사랑
가슴 밑바닥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슬픔의 앙금 같은 것을 휘저어놓는 느낌, 그런 묘한 공감의 순간이 있었다. (현대문학상 심사평)
소멸해가는 것을 감싸 안으면서 사랑의 형식을 치열하게 탐색하는 작품. (시작작품상 심사평)
1991년 현대시세계 로 등단하여 올해로 등단 25년을 맞은 시인 허연의 네번째 시집 오십 미터 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는 2013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외 6편과, 시작작품상 수상작 「장마의 나날」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95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로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긍정의 정공법으로 ‘무의미의 의미’라는 두려우리만치 아름다운 미학을 창출해냈다 (문학평론가 황병하)라는 극찬을 받았던 시인 허연은, 13년 만에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를 묶으며 도시 화이트칼라의 자조와 우울을 내비치며 독한 자기규정과 세계 포착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이어 2012년 세번째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에서 삶의 허망하고 무기력한 면면을 담담히 응시하며 부정성 내부에 숨 쉬는 온전한 긍정의 가능성을 찾아나갔던 허연은, 이번 시집 오십 미터 로 세월 속에 찌든 슬픔, 마모되어 소멸해가는 존재들에 시선을 보내며 일상 속에 안주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날선 타자로 견뎌나가는 시인의 사투, 그만의 업(業)을 완성하려는 치열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나쁜 소년 같고, 상처 받은 나비 같은 시인 허연. 시인으로 살아온 25년의 세월 동안 예민한 감각으로 도시의 쓸쓸한 풍경을 포착하고 거침없이 고통을 가로지르며 삶의 노예가 되지 않고자 몸부림 친 절실함의 기록이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인의 말
1부
아나키스트 트럭 1/오십 미터/북회귀선에서 온 소포/날짜변경선/거진/가시의 시간 1/오늘도 선을 넘지 못했다/나의 몽유도원/천호동/자세/안개 도로/좌표평면의 사랑/델타/들뜬 혈통/그날의 삽화/FILM 2/행성의 노래/물고기 문신/점토판/제의(祭儀)/세일 극장/아나키스트 트럭 2/Midnight Special 3/가마우지 여자/안젤름 키퍼/장마의 나날/사십구재
2부
목련이 죽는 밤/예니세이/명동의 세월/FILM 1/아부심벨/석양에 영웅은 없다/가시의 시간 2/조개 무덤/마지막 무개화차 4/Cold Case 2/봄산/눈빛/죽음, 테라코타/최후의 눈물/말미잘/Republic 2/만두 쟁반/그해 여름/강물의 일/짐승들이 젖어 있다/망각이여/새 떼/직박구리/싸락눈/종탑과 나팔꽃/어떤 생이 남았다/Republic 1/섬/단풍에 울다
3부
건기 3/툰드라/소묘/폭설/word 시월/마그마/아나키스트 트럭 3/서교동 황혼/Indian Ocean/외전(外典) 1/참회록 그 후/마지막 무개화차 2/바다의 장르/외전 2/Nile 421/Nile 407
해설 | 시인의 업(業)·양경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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